2卷1冊,續集(合2冊) : 揷圖, 遺墨, 四周雙邊 半郭 19.9 x 15.5 cm, 有界, 10行19字 註雙行,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; 31.4 x 20.5 cm.
조선 중기의 학자인 장흥효의 시문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. 부장(部長) 팽수(彭壽)의 아들이며,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. 김성일․류성룡을 사사하고, 뒤에 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 이 높았다. 관계진출을 단념하고후진의 교도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. 특히, 역학(易學)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(胡方平)의 『역학계몽통석(易學啓蒙通釋)』의분배절기도(分 配節氣圖)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, 이를 고증, 연구하여 20년만에 십이권도(十二圈圖)를 추연(推演)하였다. 12월을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, 또 원회운세(元會運世)와 세월일진(歲月日辰)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「일원소장도(一元消長圖)」라 하였는데, 장현광이 이를 보고는 “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.”라고 극찬하였다. 문하에 이휘일 등 학자가 있다. 1633년에 창릉(昌陵)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죽었다. 뒤에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(鏡光書院)에 제향 되었다.
원집은 그의 외손인이휘일이 2권 1책으로 편집한 것을 저자가 죽은 뒤 그의아우 이현 일의 주선으로 1693(숙종 19)년에 목판본으로간행하였고, 속집은 저자의 후손 장상규(張相奎) 가 원집에서 빠진 것 및 부록으로 저자의 상제(喪祭) 때의 만뢰(挽誄) 등을모아 원집의 체재 대로 역시 2권 1책으로 편집하고 류범휴의교정을 거쳐 1818(순조 18)년에 간행하였는데, 비용은 경광서원(鏡光書院)에서담당하였다. 그 뒤 「광풍정중건기(光風亭重建記)」․「광풍정 중건상량문(光風亭重建上樑文)」․「봉림정사기(鳳林精舍記)」를 더 모아 1921년에 간행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. 속집 맨 끝장에 「무인유화개간우성곡재사(戊寅流火開刊于城谷齋舍)」라고 한 간기가 있는데, 무인(戊寅)은 곧 1818년이다. 그러나광풍정중건기(光風亭重建記) 아래 소자 (小字)로 쓰인, 「이하신유추인시부(以下辛酉追印時附)」라고 쓰인 것이나 책의 제본이 산뜻한 것 등으로미루어 보아 1921년의 신유년(辛酉年)으로 간년을 잡아 무방할 것 같다.
답문(答問)은 주로성리학과 음양설에 관한 것이다
「일기요어(日記要語)」․「일원소장도(一元消長圖)」부록으로 되었는데, 「일원소장도(一元消長圖)」 는 곧 저자의 평생공부인 동시에 퇴계학의 연원이 되어, 경당선생(敬堂先生)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 「일원소장도」 한편에 있다고 해도과언은 아니다. 권유(權愈),장현광, 홍여하 등 석학이 서문․묘지명에서 이 「일원소장도」의 학문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. 「일원소장도」 뒤에는 문인이며 사위인 석계 이시명의 「일원소장도발(一元消長圖跋)」이 있고, 외손이며 문인인 존재 이휘일의 평설이 있다. 속집의 서(書)는 정구사이에 오고간 성리학에 관한 문목이다. 본 책은 양적으로는 비록 4권 2책의 극히 작은 것이지만, 이현일이 원집의 발문 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저작의 가치는 양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, 독자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서 평가되는것이므로 본 책이 여느 것과는 내용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고, 권유(權愈)도 서문에서 본 책이 후학들에게 보다 유용하고 귀중한 것임을역설했다. 위의 거유(巨儒)들의평으로 미루어 본 책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.